[삶의 전쟁터에서] EP 3_2 첫번째 작업에 임하다.
2008/06/27 16:37
첫번째 작업은 바이널(Vinyl, 이하 바이널)에서 수주한 <파리 오브 유어예 _ Paris of Yuaye> 였다. 이미 디자인 작업은 마무리가 되었고, 후반 작업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물론 기존의 바이널에서 제작해오던 <파리의 보물창고>, <캐나다의 보물창고>등의 <보물창고> 시리즈의 후속판이라지만 그것들이 정보적 성격의 가이드 북이었다면 이것은 미술과 프랑스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쓰여진 작가의 기행문이었기에 종전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컨셉으로 진행되어야 했었다. K는 내가 들어오기 전, 그것에 대한 일종의 디자인적 해답(?)을 가지고 책을 완성시켜나가고 있었다. 1차 시안이 제출되고 교정지가 작업실로 당도했다. 흰색 여백을 가득 채운 흑백 LP출력본의 빨간 글씨는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느꼈을 교열, 교정 작업에 대한 압박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후속 작업의 절반 정도는 나에게 주어졌다. 아니 내가 하겠다고 했다. K는 조심스레 말했다. “이제 시작해 볼라우?” 이젠 맥킨토시와 마우스의 유혹을 받아들일 ‘건수’를 잡은 것이다. 오래간만에 밤샘작업을 했다. 모든 새로운 출발이 그러하듯, 힘들지는 않았다. 디자이너에게 밤샘은 너무나도 익숙하기에 오히려 향수가 느껴지는 그런 일이었다. 새벽녁 K는 침실에서 잠을 청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첫 번째 일에 대한 나의 성의이기도 했고, 나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벌인 일종의 쇼맨십이기도 했다.
모든 단행본 작업이 그러하듯, 교열교정 작업은 2차, 3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내가 디자인 작업에 참여했다 말하긴 힘들겠지만, 나로써는 4개월간의 공백기에서 벗어나 컴퓨터 앞에 펼쳐진 적색 그리드 선과, 스타일목록, 단축키목록 등 익숙했던 편집 툴과 다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텍스트와 사진이라는 편집의 두 가지 필수요소에 대한 친숙함을 키운 것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부리기 위한 일종의 준비 운동을 한 셈이었다. K는 말했다. “수고했어요” 학교 동기이면서 내가 한 살 형이라는 이유로 K는 여느 때처럼 나에게 존댓말을 했다. 며칠이 지난 뒤 교정집에서 보내온 최종 교정쇄가 도착했다. 페이지 전체를 4도 교정을 내었으니 분량도 상당했다. 물론 바이널에서 H편집장님과 편집팀 직원들이 대거 몰려와 새로운 작업실 칭찬도 할 겸 함께 교정 작업을 진행했고, 그렇게 인쇄 넘기기 직전까지의 과정이 마무리 되었다. 성격이 쾌활한 H편집장님은 다년간의 필드 경험을 바탕으로 능수능란하게 일들을 처리해주었다. 물론 특유의 입담과 여성스러운 목소리로 우리를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지만 작업이 시작되고 나자 분위기는 좀 건조해졌다. 어차피 교열, 교정 작업은 <모던타임즈>에서 찰리 채플린이 공장라인 위의 제품에 나사를 돌리는 일처럼, 동시에 여러 명이 나뉘어진 LP출력본 위에 다양한 색깔의 펜으로 덧칠해 나가는 기계적 과정이었다. 물론 그 안에서 디자이너는 빨간색 체크사항이 줄어드는 자그마한 기쁨을 느끼면서 얼마 남지 않은 완성에 대한 기대감으로 젖기도 한다. K와 나 둘다 그랬다.
언제나 그렇지만 표지는 맨 마지막까지 우리의 발목을 잡는 부분이다. 잘 기억 나지는 않지만 푸른 하늘을 크라프트지에 인쇄한다는 것은 좀 무리라는 의견이 편집진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강렬한 푸른 색을 탁하게 만드는 크라프트지의 특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장과 설득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K군은 자신의 디자인 콘셉을 강하게 어필하며 그것을 관철시켰다. K군은 말했다. “하늘을 표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적인 느낌이지요. 프랑스는 어딜가더라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마음을 흔듭니다. 크라프트지의 은근하면서도 거친 촉감이 그러한 느낌들을 충분히 강조 해줄 것입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예술, 끝나지 않은 예술, 영원성을 가진 예술이 곧 프랑스의 예술인 것이죠”
어떤 디자이너에게든 표지는 자기의 얼굴처럼 가장 아끼는 부분일 뿐만 아니라 자기의 디자인적 상징성에 대한 능력을 표현해낼 수 있는 좋은 시험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디자인적 자존심 그 자체인 것이다.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표지를 디자인 하기 전에 그 대지를 앞에 두고 왠지 모를 떨림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그런 것이다. 어떻든, 그것은 편집진의 의견과 다르게 매우 좋은 효과를 내었다. 특유의 거친 느낌은 프랑스의 자유분방하게 뒤섞인 예술의 다중성을 훌륭히 표현하고 있었다. 그 위에 인쇄된 푸른 하늘은 예술 속에 파고든 자연처럼 맑게 보였다. 고흐가 말했다. "화가는 자연이 시키는 대로 보여주는 사람일 뿐" 이라고... 그러했다. 모두들 재잘재잘 각자의 의견을 나누었고 H편집장님의 오케이 싸인이 떨어지자 인쇄작업이 시작되었다. K에게는 지난 50여일 간의 긴 작업이 최종단계에 이르러 누구보다 가슴이 떨리고 뿌듯했겠지만 난 이제 밥 한 숟가락을 입에 집어 넣은 상태였으니, 히딩크 형님의 말처럼 디자인에 대한 배고픔이 컸다.
인쇄 단계에는 늘 감리라는 디자이너의 마지막 책무가 기다리고 있다. 인쇄 기계는 아날로그 방식이기 때문에 한 대수, 한 대수 지날 때마다 색깔 체크를 해주고 CMYK의 값을 조정하여 최상의 인쇄물을 찍어낼 수 있도록 감독해야 한다. 혹시 모를 오타도 반드시 보아야한다. 디자이너의 오케이 싸인이 떨어지면 인쇄기장님은 어씨(Assistant)에게 인쇄기에 종이를 물릴 것을 지시한다. 인쇄기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을 시작하면 기장과 디자이너의 형형색색 인생담이 펼쳐진다. 인쇄 영업을 담당하는 부장님이 옆에서 얘기를 거들면서 절대 금연 구역인 이곳에서 서로들 참았던 담배를 꼬나 문다. 사는 얘기, 진상 디자이너, 인쇄사고 얘기, 기장님 만의 전유물인 인쇄 노하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세상엔 너무나도 많은 얘기꺼리가 있기에 그놈의 ‘인쇄밥 수다’는 끝이 없다. 물론 디자이너는 인쇄까지 오기에 너무나 많은 피로가 쌓여있는 탓에 풀려버린 긴장을 주체할 수 없어 잠을 청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우스를 놓지 않는 불쌍한 디자이너의 자존심(전 세계 공통) 때문에 잠 잘 시간은 고스란히 ‘시간 날 때’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누구에게나 하루는 24시간 인 것을… 피부가 좋은 디자이너는 천재이거나 게으름뱅이라는 속설이 마냥 하황된 말은 아니다. 인쇄가 끝나고, 제본, 제단, 후가공, 포장 단계가 끝나면 책이 완성된다. 프랑스 오브 유어예는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사고가 터졌다. 크라프트지로 된 표지 부분의 코팅이 압착이 되지 않아 모두 울어버린 것. 종이의 횡목과 종목이 뒤바뀐 것이 원인이라 했다. 횡목으로 인쇄했어야 코팅했을 시 울지 않는데 종목으로 하는 바람에 표지 넘기는 ‘결’과 종이의 ‘결’이 일치해버려 코팅에 주름이 자글자글 생겨버린 것이었다. K는 H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어 인쇄사고를 알렸고, 표지갈이(제책이 완료된 상태에서 표지를 뜯어내고 새로운 표지로 갈아붙이는 일)를 해야 하는 가를 놓고 의견을 나눴다. 결국 표지 갈이까지 가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인쇄소의 책임도 있었지만 우리 측이 인쇄소에 주의할 것을 요구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이런 인쇄사고가 나서 재인쇄를 걸어야

며칠 후 우리는 서점에서 그 책을 보았다. 자신이 디자인한 책을 서점에서 다시 열어보는 희열은 아마도 이 작업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 안에 담겨있는 자신의 땀과, 고뇌의 시간들, 마치 내 자식을 바라보는 듯한 애틋함은 그동안의 힘듦에 대한 최고의 보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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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이런 사연이;; '울어버린' 걸 발견하셨을 때 마음이 얼마나 쓰라리셨을까요 -_-;; 그런데 표지넘기는 '결'과 종이의 '결'이 일치했을 때 운다.. 아이러니한 묘한 느낌이 드는 문장인걸요. 사실 왜 그런지는 아무리 읽어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재밌어요 ㅋ
표지를 넘길 때 수직방향으로 접히는데, 종이도 수직 결이라서 얼씨구나하고 코팅이 다 떠버린거죠. ㅎㅎ
아직 민소님 수준의 백만분의 일도 쫒아가질 못했으니 많이 노력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