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전쟁터에서] EP 3_5 고정관념에 저항하다.

2008/07/04 17:01



사용자 삽입 이미지
6월 말, 본격적인 무더위가 우리를 힘들게 했다. 이건 장마기간이 맞기나 한 건지 의아할 정도 연일 땡볕이 내리쬐었다. 우리에게 에어컨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그 ‘더위’라는 놈이 우리의 숨통을 점점 조여 오고 있었으니, 우리는 매일매일 더위와 맞선 투사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제 새로운 프로젝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AV Walker>였다. K는 2005년 말미부터 이 씨리즈를 제작해왔었는데, 이번이 세번째 단행본이었다. 동남아 휴양지를 중심으로 한 여행커뮤니티를 운영하는 Aqua의 컨텐츠와 Vinyl의 디자인이 하나가 되었다. 그리하야 서로의 이니셜을 딴 이름이 AV Walker. 이 단행본 씨리즈는 1편 <푸켓 _ Phuket>, 2편 <방콕 _ Bangkok>이 이미 발간 되었고, 이번엔 <필리핀 _ Philippines>편을 제작하게 되었는데, 보라카이와 세부, 마닐라, 보홀 4곳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는 구성이었다. 1편과 2편은 모두 K가 디자인을 담당했는데, 디자인 퀄리티가 좋아서 3편도 시각이동에서 디자인을 하게 되었다.

사실 이 프로젝트를 K가 시작하게 된 일이 참 재미있다. <AV Walker> 씨리즈가 기획되고 제작에 들어갔을 때, 바이널의 편집팀은 <파리의 보물창고>와 <캐나다의 보물창고>를 디자인했던 W선배에게 이 프로젝트를 맡기려고 했으나 W선배는 일에 과부하가 걸려 진행이 어려웠고, 또한 견적 상의 문제도 중첩되어 있었다. 원래는 W선배는 H선배와 함께 바이널 안에 출판 편집팀으로 묶여 함께 일을 하다가 얼마 후 독립을 한 탓에 자연스레 견적에서의 문제도 불거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디자인에 관한한 자기주장이 강한데다가 완벽주의자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편집팀은 W선배와 함께 일하는 것을 까다로워했다. 하지만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거치며 거시적으로 인정받아온 그의 활약상은 바로 그러한 꼼꼼함과 창작에 대한 열정에 근본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나무라지는 못했다. 이에 바이널의 편집팀은 좀 더 다루기 쉽고 비용이 덜 드는 디자이너를 원했다. 그래서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어느 디자이너에게 이 작업물의 시안을 맡겼다. 며칠 후 시안을 받아 본 편집팀은 경악하고 말았다. 기대했던 수준보다 너무나도 형편없는 시안을 받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맡기면 W선배 디자인 수준은 될 것이라는 편집팀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아니 그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손을 꼽을만한 훌륭한 디자이너를 옆에 두고 일을 했고, 또한 바이널에서 일하는 감각있는 디자이너들이 옆에 있었으니 그 정도는 기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의 생각이었다. 우리나라의 많고 많은 편집진들이 가지고 있는 디자이너를 향한 그들만의 우월주의적인 생각이 만든 해프닝이기도 했다. 디자인을 아주 쉬운 기술 정도로 바라보는 시각. 창작에 대한 고통과 노력에 대한 일말의 이해도 없이 쉬운 것으로 규정해 버리는 시대착오적 인식. 이것들은 늘 디자이너를 괴롭히는 고정관념이었다. 난 이 에피소드를 듣고는 긴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만큼 디자이너는 디자인 말고도 바꿔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라는 생각도 했다. 세상은 인위적으로 빨리 변할 수 있지만,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일은 재촉해서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우리 스스로 주어진 시간에 그런 선입견들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해프닝 후 바이널 편집팀은 디자이너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디자이너를 이해하는 아량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바이널 편집팀과 디자이너들은 그런 교감을 바탕으로 그 전보다 더욱더 밀접해 친밀해졌다. 서로를 배려하여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탄탄한 팀웍이 형성된 것이다. 그 점만큼은 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프로젝트는 일시 중단되었다. 시안은 폐기되었고, 편집팀은 돈이 들더라도 확실한 디자인 수준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제3의 디자이너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W선배에게 편집팀은 좋은 디자이너를 소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어느 날, W선배는 K에게 이 프로젝트를 해볼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안그라픽스를 막 나와서 개인작업실을 차린 K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안그라픽스에서도 좋은 평판이 많았던 지라 자신감도 있었으리라. K는 수락했다. 그리고는 폐기된 시안을 받아보았다. 때마침 인사 차 그곳에 있던 나도 함께 보게 되었는데, 서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시안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네가 어떻게 작업을 해도 이것보다 나을 수 밖에 없겠는걸?” K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뭐, 상대적으로 잘하는 것보다, 절대적으로 잘해야지.” 그 후 <AV Walker – Phuket>편이 출간되었고, 후속편인 <Bangkok>편까지 성공적으로 출간이 되었다. 편집팀이 디자이너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모두 떨쳐버렸는가에 대한 의문(쉽게 바뀌지느 않을 것이란 생각에…)은 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디자인면에서 그 두 개의 단행본은 성공적인 성과를 얻었으니, 디자이너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한셈이었다.



다음에 계속 >>>

2008/07/04 17:01 2008/07/04 17:01

Trackback » http://www.monrecit.com/insoos/trackback/904

  1. vic 2009/02/10 21:3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안녕하세요-
    리서치를 하다가 한 칼럼을 보고 들어와서 이것 저것 다른 글들도 읽어보는데 작업도 너무 맘에 들구 글도 너무 재밌게 잘 쓰세요^___^
    이번이 마지막 학년이라 이 글처럼 사회생활(?)에 관한 글도 마냥 신기하고 궁금하고 그러네요-
    참, 저는 인테리어 디자인 전공하는 학생이구요, 편집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아요-(학기말에 final book을 제출해야 하는 터라;;)
    덕분에 인디자인을 3D 맥스보다 더 자주 사용하고 있답니다- 하하;;;

    계속 좋은 글 부탁드려요~

    • insoos 2009/02/11 14:04  address  modify / delete

      아 안녕하세요.
      아직 학생이시군요. 아직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부푼 기대감만으로도
      희망찬 시기이기도 하니 저에게는 부럽기만 하군요.
      VIC 이라는 닉네임을 보니 왠지 영화 라붐의 소피마르소의 유년시절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농담)
      이런 글을 쓰면서 칭찬도 받았고,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나하나 기록해 나가는 기쁨이 있습니다.
      디자인이란 바다가 워낙 거대하고 깊어서 헤어나오지 못할때면
      이렇게 다른 쪽으로 머리를 쓰는 버릇이 생겼거든요.

      언제 또 쓰기 시작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국을 이 때의 일들을 다시 쓰게 될 겁니다.
      지금의 일들도 포함해서 말이죠.
      디자이너를 아는 사람은 많지만 그들의 애환을 아는 사람은 적으니...

      VIC님도 사회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쑥쑥 잘 자라는 디자이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방문 감사합니다.
      자주들러주세요. ^-^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