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전쟁터에서] EP 3_6 둘째 아이가 태어나다. (AV Walker _ Boracay, Cebu, Manila)
2008/07/05 17:58
A는 작업실에 와서 자기 자리를 셋팅했다. 며칠은 잘 흘러갔다. 디자인 작업도 잘풀리고 있었다. 문제는 더위. 이젠 열대야까지 나타나 우리를 괴롭혔으니 A는 특유의 조잘조잘 말투로 “이거 더워서 마우스 질이 안되네.” 나도 거들었다. “K사장, 우리 더위에 쓰러져 죽걸랑 서늘한 그늘에 뭍어줘. 절대 양지 바른 곳에 뭍으면 안돼.” K는 실실 웃더니. “알았어. 이 양반들! 에어컨 하나 업어올께” 우리는 모 광고 카피처럼 “시각이동에 에어컨 하나 놓아 드려야겠어요”와 같은 상황이었다. 등짝과 겨드랑이에서 땀이 샘솟을 뿐더러 남자들만 징그럽게 모여있다 보니 그 우중충한 분위기에 마우스 잡은 손이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했다. 수다를 떨 힘도 없고, 마우스를 쥔 손은 기력을 잃고, 모니터의 글자와 사진들은 하나, 둘 LCD에 눌러붙기 시작했다. 샤워효과는 딱 30분간 유효했다.
K는 곧바로 에어컨 수배에 나섰고, 중고매물로 나온 에어컨을 싼값에 들여놓았다. 처음 에어컨이 돌아가기 시작한 날은 작업 시작 5일째였다. 우리는 한동안 작업을 멈추고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는 온 몸이 오싹해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오래된 에어컨에서 산다는 레지오넬라 균이나 잔뜩 쌓여있을 먼지들은 우리의 다정한 친구가 되어 “우리 왔어요!”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몸 구석구석에 포진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린 것. 에어컨 설치 기념 중국집 짬뽕과 영화 한 편까지, 우리들은 망중한을 마음껏 누렸다.
작업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1차시안까지 주어진 시간은 열흘이 채 안됐다. “젠장 무슨 주간 잡지도 아니고, 열흘만에 200P 작업을 다하나? 글줄을 주룩주룩 흘려 넣는 일반 단행본도 아니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모두 디자인해야 하는 이런 여행가이드 북을 어떻게 열흘만에 하란 소리야” A와 나는 투덜투덜, 재잘재잘, 웅성웅성 쓸데없는 얘기들을 하며, 그래도 분주히 마우스를 움직였다. 아무리 투덜대도 시간은 가고, 주어진 시간을 늘어나지 않는다. 시간 달라는 땡깡을 부리기 위해 1인시위를 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 시간에 디자인에 대해서 얘기하면 퀄리티가 100배는 좋아지겠다.”라는 K의 말에, 순식간에 우리들은 철없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나의 헛소리에, “슈퍼맨 보고 잠깐 멈추게 하라고 시키지 뭐” 라며 더 말도 안되는 소리로 A가 받아쳤다. 서로 웃었다.
지난 작업의 포맷을 전체적으로 유지한다지만, 메인 칼라 선정과 Report, Special 페이지, 목차, 그리고 이 책만의 개성있는 요소들을 넣어야하고, 기타 크고 작은 부분들의 디자인이 빠뀌어야 하기 때문에 거의 새로운 책을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쉬운 줄 알고 참여했던 A는 혀를 내둘렀다. “이거 약속이 틀리잖어” 하며 웃었다. K는 중간중간 디자인을 체크해주었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는 부분은 함께 논의 했고, 아이디어를 즉석에서 내기도 했다.
내가 맡은 부분은 보라카이와 세부였고, A는 마닐라와 보홀 부분을 맡았다. 앞의 목차와 인트로 부분, 뒤의 부록 부분도 내가 담당했다. 바이널 편집진은 몇 권의 단행본 제작 경험을 통해 쪽배열표와 함께 작업할 글과 사진을 잘 정리해주었고, 이는 우리들의 빠른 작업진행에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다. 쪽배열표에 나와있는 순서대로 글과 사진을 폴더 별로 정리하고 원고에는 단락에 붙어야할 사진파일까지 명시해주었다. 물론 그것은 모두 Aqua측과 협의된 내용이었다. 우리는 오로지 디자인에 신경만 쓰면 되는 일이었기에, 작업을 하다가 발생할 수 있는 나타나는 여러가지 잡음이 적었다. 한마디로 작업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이미 앞서 두 권의 <AV Walker> 시리즈에서 서로들 노하우를 터득한 탓일까? 일사불란한 작업이었다.
주어진 날짜에 우린 작업을 완료했다. 1차 시안이 편집팀에게 넘겨졌고, A와 나는 탈진한 듯 목을 의자 뒤로 젖힌 채 뻗어있었다. 밤새도록 막판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얀종이 위 LP로 인쇄된 시안에 갈기갈기 긁혀져 있을 빨간펜의 압박을 기다리고 있었다. A와 나는 잠시 침실로 들어가 취침을 했다. 일주일 동안 죽도록 한 작업은 단 몇 시간만에 수정사항이 첨부되어 돌아온다. “불공평하다. 교열교정 작업도 한 일주일 걸려야지.” 하며 서로들 웃었다.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빨간펜을 상상하면 오산, 디자이너에게 빨간펜은 압박이다. 피흘리듯 쭉쭉 뻗은 빨간 흔적들은 무섭기까지 하다. 200여페이지의 시안은 바이널을 거쳐 Aqua를 거쳐 시각이동으로 돌아왔다. 취침을 하던 우리를 K가 깨웠고, 우리는 수정작업을 시작했다. 물론 2차, 3차에 걸쳐 수정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최종 시안은 실제 크기로 출력하여 가제본으로 만들기로 했다. 최종 수정 마지막 이틀은 Aqua에 있는 왕사장님과 부하직원이 와서 내 옆에 붙어 일일이 체크하고 수정했다. 막판에 쪽배열이 바뀌고, 챕터 순서가 바뀌고, 다수의 사진이 교체되었다. 한 사람이 200여 페이지를 모두 수정하는 것이 이만저만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힘을 내었다. 표지제목은 원래 <AV Walker _ Philippines>였지만, 나중엔 <AV Walker _ Boracay, Cebu, Manila>로 바뀌었다. 필리핀이란 이름보다 각각의 여행지 이름이 더 알기 쉽고, 대중에게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표지 포맷은 기존의 면분할 형식을 따라 적용되었고, 타이포그래피가 일부 바뀌는 정도로 변화를 주었다.
A는 보름 정도가 지나자 얼마 남지 않은 휴가를 아쉬워했다. 우린 그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최종수정은 K와 내가 하기로 했다. 함께 피서 가자던 약속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는 우리를 이해해 주었다. 고마웠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책은 그로부터 열흘 정도가 더 지난 후에 출간되었다. 나와 K, A 모두에게 좋은 추억이 될 만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책으로 나온 결과물을 보고 있자니 왜 이렇게 틀린 곳들이 많이 보일까? 내 머리를 자학하며 안타까워하면서도 난 그래도 그윽한 미소가 멈초질 않았다. 책장을 넘기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속에 베어 든 우리들의 땀과 노고, 그리

이렇듯 난 또 한 걸음 나아갔고, 또 한 계단 발전했다. 책장에서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파리 오브 유어예> 옆에 나란히 <AV Walker>를 꽂아 놓으며, 한참 동안 그 곳에 눈을 맞추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책과 내 마음이 닿아 하나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 때문이다. “이제 둘째가 태어났군” 난 혼자 중얼거렸다. 아이는 태어나면 힘들어지지만 작품은 태어나기까지가 힘들다. 하지만 태어난 후엔 영원히 내 곁을 따라다닌다. 내가 그것을 잊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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